10번째 이직

Daily/Diary 2021. 6. 17. 01:05

 

10번째라니...ㅋㅋ 퇴사전 한 달 정도는 널널했는데 실컷 딴 짓하고 있다가, 잠잘 시간도 없을 이런 때 이러고 있다. 이런 큰 이벤트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고... 가만히 돌이켜보면 이 9번째 회사는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을 많이 가져다 줬다. 팀원들과 마찰 한 번 없이 즐겁게 일할 수 있었고, 홀로서기도 성공했으며, 코인으로 거지가 됐었지만 주식으로 다시 일어섰고, 지금은 그 때의 근속과 커리어로 만족할 만한 10번째 회사를 맞이했다.

6년전으로 돌아가보면 진짜 내가 다닐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회사였는데 정말 운명처럼 입사를 하게 됐고, 썩 좋은 대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많은 개발자들과 섞일 수 있다는 것에 메리트를 느꼈었다. 그 때쯤 개발1팀, 2팀 합치면 30명이 조금 넘었고, 누구나 경험해 봤으면 알겠지만 얼마 못가 사람수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는 걸 느끼긴 했다. 진짜 메리트는 회사의 네임밸류였지. 삼성/엘지 같은 엘리트 느낌은 아니었지만 훨씬 세련된 누구나 신기해 하는... 그랬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한 회사당 나의 평균 유통기한은 약 1년 반이었다. 퇴사 사유도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다. 경영악화/권고사직/깊은빡침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사유들이 반복되다보니 회사에 대한 애정같은 것이 없었고, 그러다가 퇴사하고 나면 나를 필요로 하는 그저 그런 회사들을 또 기웃거리는 그런 반복이었던 것 같다. 9번째 회사 역시 그런 방향으로 흐를 줄 알았다.

처음 1~2년은 꽤 일이 많았다. 야근도 많았지만, 띠 동갑이 넘는 팀원들과 술도 마시고, 워크샵도 가고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일했다. 워크샵 얘기하니까 사이트 오픈 때문에 하와이 못따라갔던 2016년이 잠시 생각이 난다...ㅡㅡ 아무튼... 새벽에 출근해서 운동하고 일하다가 새벽에 퇴근하니 차도 안막히고, 주차도 꽁짜. 가장 좋았던건 나를 피곤하게 하는 인간이 없었다. 꼰대처럼 중앙에 앉아 노려보고 있고, 재촉하고 그런 인간도 없었다. 내가 그들 사이에선 꼰대였을지도... 그렇게 지내다보니 회사를 다니는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피곤하거나 힘든 적이 거의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얼마전 그알에도 나왔지만 그런 인간마저 잘리지 않는 회사에서 내 발로 나오기 전까지 잘릴 일은 없을 것 같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헬스와 칼퇴 문화를 이룩하며 나에게 최고의 워라밸이 됐다. 코로나 터지고 나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그런 회사를 고민고민 끝에 내 발로 나오게 됐다.

일단 내 나이가 너무 많아졌다. 우리 고인물들은 그대로 고여 있고, 이런저런 일이 생기며 팀이 불이익을 받게 됐지만, 지들 목숨 역시 파리목숨 인지라 조용히 그걸 또 이겨낸다. 그런 와중에 노릇은 하고 싶어서 보고는 열심히 받고 싶어하지. 내가 뭐 돈을 많이 달라고 했나, 평가고 나발이고 그저 선착순인 회사. 선착순 뿐이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갑자기 주사위 아니 사다리타기로 사람들을 평가하다니... 모욕적이었다. 이 나이면 다른 팀들은 사장이랑 맞다이 뜨고 있는데... 이렇게 있는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쪽팔리면 안된다 아이가. 지금까지는 마치 누구 뒤에 숨어있는 듯한 모양새였는데, 나이가 들면 나이값을 하고 살아야지 이건 아니자나... 어쨌든 그리하여 고심 끝에 떠나려 하니 여친이랑 헤어지는 것 마냥 어찌나 마음이 안좋던지. 6년 넘게 지냈다고 정은 많이 쌓여가지고... 요즘도 간혹 그들이 보고 싶을 때는 그냥 참고 다닐껄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냥 지금껏 해온 것처럼, 내 할 일만 열심히 하고 있었으면 그만인데...

어쨌든 불만을 품게 되니 최대한 빨리 그만 두고 싶었다. 그런 감정으로 출근하는 것도 짜증났고, 빨리 다른 회사들도 알아보고 싶었다. 빨리는 아니고 천천~히 알아보고 싶었다. 이제 예전처럼 함부로 아무 회사나 가고 싶지는 않았고,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좋은 조건을 찾아서 이직하고 싶었다. 운 좋게도 금방 좋은 소식이 들려왔고, 갑자기 억울해진 나는 급하게 네카라쿠배당토에 꾸역꾸역 지원을 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자기소개서만 평균적으로 2시간 이상씩은 쓴거 같은데, 대부분 초스피드로 광탈했고 나는 맘 편하게 10번째 회사에 입사할 수 있게 됐다.

지금 10번째 회사에서는 한 20일쯤 됐지만, 사실 예전보다 즐겁지는 않다. 그 때는 정말 맘 편하게 나하고 싶은거 다 하면서 살았고, 지금은 그냥 일만 열심히 해야 한다. 차로 40분 걸리던 출퇴근 길이 대중교통 2시간짜리로 늘었고, 헬스를 하려면 새벽에 한시간 더 일찍 일어나 집에서 후딱 하는 수 밖에 없다. 점심에 닭가슴살과 고구마를 즐겨 먹었지만 이제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식당밥을 먹어야 한다. 참고로 나는 밥도 혼자 느긋하게 먹는거 좋아하지 사람들 눈치보면서 급하게 먹는 그 문화가 너무 싫다. 하지만 이 식사 테이블에선 마흔 네살에 막내인지라 후딱 먹어야 한다.ㅋㅋ 같은 이유로 퇴근 시간에도 눈치를 보며 퇴근을 편하게 못하고 있다. 하~ 이렇게 얘기하니까 전 회사랑 너무 비교되는데.ㅋㅋ 근데...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이렇게 산다. 코로나 시대에 시간을 그렇게 많이 줬어도 이룬 것 하나 없으니, 이렇게 사는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지금은 없는 시간 쪼개서 뭐라도 하니 나름 성취감을 느끼고 있다.

이 곳의 가장 큰 특징은, 직급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다들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다.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 해야할 일들의 구분이 확실하고 그 일들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 프로젝트의 특성상 그럴 수 밖에 없긴 하지만... 9시고 10시고 지맘대로 출근해서 밥 한끼 때우고 커피나 한잔 마시다가 회식자리나 만드는 그런 인간들이 없다는게 참 다행스럽다. 일할 맛이가 나쟈나. 꼭 그런 인간들이 월급도 많이 가져간다고.

암튼 결론적으로 나는 편하게 다닐 수 있는 회사보다, 나를 더 필요로 하는 회사로 이직했다. 조금이나마 나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곳으로 이직했다.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는 곳으로 이직했다.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회사로 이직했다. 18년 동안 틀에 갇혀 모니터만 보고 살았는데 이제야 회사 돌아가는게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여러면에서 예전보다는 조금 더 힘들고 어색하지만 적응하려고 노력중이다. 힘들게 내린 결정인 만큼 원하는 회사에 들어올 수 있게 되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이번 회사에서 좋은 추억까지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이 바닥의 능력자가 되서 나가리라.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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