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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왕은 정몽주 마저 죽은 뒤 이성계가 자신을 해할 것이라 생각하여 신하인 시중 이성계와 동맹 맺을 계획을 세운다.
1392년(공양왕4년) 7월 공양왕은 이방원을 불러 이성계와 동맺을 맺으려 하니 맹세의 글을 받아오도록 지시한다.
이에 이성계는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희가 주상의 말씀에 따라 기초해 보도록 하라." 고 하자 다음과 같이 초안을 작성했다.

 

"경이 없었으면 내가 어찌 이 자리에 앉았겠는가? 그러니 경의 공덕을 내가 어찌 잊으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곁에 있으니 자손대대로 서로 해치는 일이 없을 것이로다. 내가 경을 저버리는 일이 있을 경우 이 맹세가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초안을 왕에게 올리니, 왕이 좋다고 했다.
공양왕은 며칠뒤 이성계의 집에으로 가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동맹식을 거행하려 했으나,
이미 우시중 배극렴 등이 의장대와 경호병을 데리고 왕대비 안씨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건의(강요)했다.
"현재의 왕은 용렬한 사람이라 군왕의 자격을 상실했고 인심마저 떠나 나라와 백성들의 주인이 될 수 없으니 그를 폐위시켜 주소서."
결국 공양왕은 계획했던 동맹도 맺지 못하고 왕대비의 시지에 따라 폐위가 결정되어 고려는 475년 만인 1392년에 결국 멸망하게 된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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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공양왕 4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왕석)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눕게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고려 충신 정몽주는 이를 기회삼아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일파의 핵심 인사들을 모두 귀양을 보내지만 이방원이 이성계를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여 무산된다.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하였다.

 

정몽주는 문병차 이성계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이방원은 회유의 시조 <하여가>에 <단심가>로 거절한 정몽주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결국 정몽주는 귀가길에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살해된다. 정몽주가 살해되기 전 귀가하며 친구 집에 들려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탔는데 마부가 이유를 물으니,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직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 라고 답하였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집을 방문하기 전에 이미 변중량을 통해 이방원의 살해 계획을 입수하였다고 한다.

 

이성계는 이 사건으로 인해 아들 이방원에게 다음과 같이 책망하였다고 한다.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가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이렇게 불효한 짓을 감히 하니 내가 사약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이렇게 역성혁명을 저항하는 마지막 고려 충신 정몽주가 죽음으로써 이성계는 곧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조선을 건국한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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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이초의 옥사, 윤이·이초 사건, 윤이·이초의 무고 사건.
고려시대 최후의 임금 공양왕 2년(1390)에 고려 무신 윤이(尹彛)와 이초(李初)가 이성계 일파의 정변을 막기 위해, 명나라 주원장에게 무고(거짓으로 보고함)한 사건이다.

 

- 공양왕과 이성계가 공모하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
- 이를 반대한 이색 등 고려 재상 19인이 살해/감금/유배 될 것이다.
-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친(姻親)이다.
- 이성계는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다.

 

어색한 무고로 명나라로 하여금 시중 이성계를 없애려 하였지만, 이성계의 측근 정도전이 명나라로 가서 해명하며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 사건을 계기로 반대 세력인 고려 유신 10여명(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양촌 권근, 인재 이종학, 우현보... )을 제거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고려 유신들을 청주 옥사에 하옥한 후 윤이와 이초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조사하였으나 증거를 찾지 못하였다.
결국 윤이와 이초만 유배시키고 사건이 마무리 되면서 모두 석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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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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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고려31) - 우왕(고려32) - 창왕(고려33) - 공양왕(고려34).

 

공민왕과 공양왕 사이에 낀 우왕과 창왕은 정통인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돈의 아들인 신씨(辛氏)라는 주장으로 인해 폐위까지 이른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폐가입진(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들임)'을 내세워 우왕과 창왕을 내몰아 죽이게 되는데, 우왕의 출생배경을 돌아보면 이러하다.

 

신돈에게 '반야'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자식이 없어 고민하는 공민왕에게 바쳐 아들인 우왕을 낳게 되는데, 우왕은 출산부터 어린 시절을 신돈의 집에서 보내게 되고, 7살이 되던 해(공민왕20년)에 궁궐에 입성하게 된다. 공민왕은 우왕의 정통성 논란을 예견하고, 우왕은 이미 죽은 궁인 한씨의 아들이라 발표하였는데 공민왕이 죽은 뒤 우왕 2년에 '반야'가 우왕의 생모임을 주장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어릴적 궁에서 자라지 않았던 점에 의해 의혹이 생기게 된다.
이성계 일파는 반야가 신돈의 여종임을 근거로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이 신돈의 후예라 주장하며 조선의 개국을 합리화시킨다. 조선의 학자들이 편찬한 정사인 《고려사》에는 반야를 신돈의 첩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 내용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우왕과 창왕의 신돈 후손설은 조광조가 비판한 후 송시열이 재비판하였고, 그 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신돈 후손설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조작한 설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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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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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기 1388년(우왕14) 음력 5월, 요동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이른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개경으로 회군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신/구 세력의 교체가 진행되어 고려 충신인 최영이 축출되고 신진사대부와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창건하는 기초적 계단이 확립되었다.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이 과거 원나라 때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있었던 철령(鐵嶺) 이북 지역의 고려 지역 반환을 요구해왔다. 마찬가지로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요동 지역이 원래 고려의 영토였는데 우왕은 이에 요동정벌을 결심하였고, 이성계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하며 요동정벌을 반대하였지만, 최영에 의해 강행된다. (최영은 우왕의 장인이기도 하다.)

 

* 4불가론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
둘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셋째,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넷째,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우왕은 서경(평양)에서 최영을 팔도도통사,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다. 조민수와 이성계가 원정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여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도착하였는데, 큰비로 인해 강물이 범람하고 사졸(士卒)중 환자가 발생하게 되자 진군을 중단하였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상의하여 요동까지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의 운반이 곤란하다는 등을 우왕께 올리며 회군을 청하였다. 하지만 평양에 있는 우왕과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속히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성계는 조민수와 결의하여 왕명을 어기고 결국 회군을 결심하였고, 돌연한 회군에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서 개경으로 급히 귀경하였다. 최영은 개경에 당도한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고양)에 유배하였다가 처형하였으며, 우왕을 폐위시키고 강화도로 유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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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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