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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

History (Korea)/1392-1897 2014. 11. 14. 00:14

 

 

 

호정 하륜(1348년 1월 22일 ~ 1416년 11월 24일)은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이다.
태종의 최측근 인사이자 책사의 한 사람으로, 태종은 하륜을 자신의 장자방(장량)이라 했다.

 

초은 이인복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이어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선배인 정도전, 정몽주, 조준 등을 만나게 되었다.
정몽주의 문하생 권근, 이인복의 동생 이인임과도 가까이 지냈고, 이인복은 하륜의 사람됨을 보고 동생의 딸과 결혼을 시켰다.
공민왕 말년부터는 신진사대부와 가깝게 지내다가 정도전 등의 권고로 권근 등과 함께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였다.

 

하륜은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았는데 정안대군 이방원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안대군의 장인 민제를 만나서 간청하여 이방원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이후 그의 심복이 되었다.
정권을 잡게 되는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의 최측근으로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했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정도전이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정보를 입수,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등을 불시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석과 이방번을 제거했고, 제2차 왕자의 난에서는 박포 일당의 거병 계획을 미리 파악한 뒤 회안대군 이방간, 맹종 부자와 박포를 체포, 박포 일파를 죽이고 회안대군 부자를 유배시켰다.
태종 즉위 후 적서 차별, 호패법, 신문고, 저화(화폐) 사용 등을 건의, 불교를 비판하고 명나라에 자주 왕래하여 외교에도 공이 컸다.
후에 인사 청탁을 많이 받는다거나 정책을 태종과의 밀담으로 추진해 나간다는 비판을 샀다.
 

 

  • 공민왕14년(1365) : 문과에 급제, 이인미의 딸과 결혼.
  • 공민왕17년(1368) : 감찰규정을 지내고 있을 때 신돈을 공박하다가 좌천/파직 됨.
  • 공민왕20년(1371) : 신돈이 사형당하자 복직되고 교주·강릉 도찰방에 오름.
  • 우왕6년(1380) :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남.
  • 우왕9년(1383) : 어머니 3년 상을 마친뒤 복직.
  • 우왕11년(1385) : 명나라의 사신을 서북면에서 영접하는 일을 맡음.
  • 우왕14년(1388) : 최영의 요동 공격을 불가능하다며 적극 반대하다가 양주로 유배. 최영 처형 뒤 복직.
  • 공양왕3년(1391) : 전라도도순찰사가 되고 조선의 건국에 참여.
  • 공양왕4년(1392) : 고려가 멸망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였으나, 이성계가 즉위 후 경기좌우도관찰사에 기용.
  • 태조2년(1393) : 한양 천도 적극 주장.
  • 태조4년(1395) :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했으나 곧 기복되어 복직.
  • 태조5년(1396) : 명나라 홍무제가 표전물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정도전을 소환하였는데, 대신 명나라에 들어가 해명.
    (이 과정에서 정도전으로부터 계림부윤으로 좌천되었다가 탄핵받고 파면, 수원부에 안치되었다가 복직, 충청도도순찰사가 됨)
  • 태조7년(1398) : 제1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운 공로로 문하우정승까지 승진.
  • 태조9년(1400) : 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권력의 실세가 됨.
  • 정종2년(1400) :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진산부원군, 좌명공신 1등에 책록.
  • 태종1년(1401) : 관직을 사임했다가 다시 복귀. 문하생 윤회가 과거에 급제하여 적극적으로 후원.
  • 태종16년(1416) : 영의정부사까지 역임하고 노환을 이유로 치사 후 객사.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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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왕자의 난

 

태조 7년(1398년) 음력 8월 태조의 이복 형제 간의 싸움. (방원의 난 / 무인정사 / 정도전의 난)

 

태조에겐 정비인 한씨(신의왕후: 6남) · 계비인 강씨(신덕왕후: 2남), 두 명의 정처가 있었다.
강씨의 집안 배경 및 강씨의 두터운 인맥과 지모의 도움으로 개국왕에 큰 바탕이 되어, 정비로 삼고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한씨의 5남 이방원 역시 부왕의 창업을 도와 공로가 큰지라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398년(태조 7) 음력 8월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비밀리에 모의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이유로 여러 왕자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하려 한다며, 방석 · 방번 · 정도전 일파를 살해했다.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는 과정에서 이방원은 야심이 없던 둘째형 이방과(정종)에게 왕의 자리를 양보하고, 아우들을 살해한 주동자로써의 책임을 떠맡기는 형국이 된다.

 

 

제2차 왕자의 난

 

정종 2년(1400년) 태조의 동복 형제 간의 싸움. (방간의 난 / 박포의 난)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은 인격·공훈·위세가 방원에 미치지 못하여 항상 시기하고 의심하며 불안해 하고 있었다.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난을 성공적으로 이끈 지중추(知中樞) 박포는 상작이 높지 못한데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넷째 이방간이 왕세제 자리를 넘보고, 박포와 손을 잡아 난을 일으켰지만 이 역시 이방원이 승리로 이끈 후 이방간을 유배시키고 박포를 처형하였다.
이후 이방원은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으며, 아울러 2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그 해(1400년) 음력 11월 정종에게 왕위를 넘겨받고 이방원은 조선의 제3대 왕(태종)이 된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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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1335~1408)는 고려 말의 무신이자 조선의 초대 왕(1392~1398)이다.
성(姓)은 이(李), 본관은 전주, 휘는 단(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晋), 호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이다. 원나라 쌍성총관부에 속해있던 함경도 영흥 흑석리에서 환조 이자춘과 의혜왕후 최씨의 적자로 태어났고, 아버지 이자춘은 원나라의 다루가치를 지내다가 원나라가 쇠퇴하자 고려에 귀화했다.

 

고려 공민왕(1356: 공민왕5)때부터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우며 변방의 무명 장수에서 일약 고려 제일의 장수가 되었다.
계속되는 승전은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벼슬도 올라갔다. 군사력을 갖춘 신망받는 이성계에게는 자연히 신진사대부들이 몰려들었고, 이론과 정치적 연고가 부족하던 그는 신진사대부와 연대하여 정몽주, 정도전, 이색, 성석린, 최영, 조민수 등과 결속력을 다져나갔다.

 

1388년 2월 명나라가 철령(강원도 안변) 이북의 땅을 점령하겠다는 통고를 하자 최영은 반발했고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이자고 하였다. 최영과 우왕(1388년)은 명나라 기지인 요동 정벌을 주장했지만,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하였다.
결국 1차 요동정벌이 단행되었고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개경으로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하고 최영을 제거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은 조선왕조가 개창되는 단초를 이룬 사건이며, 정도전 · 정몽주 등의 적극적인 찬성과 지지 덕에 내부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 등의 역성혁명파(급진개혁파)를 이끌고 신 왕조를 수립할 계획(쿠데타)을 세우자, 고려에 충성하던 이색, 정몽주는 이성계의 적(온건개혁파)이 된다. 정도전을 통해 이색과 정몽주 등의 구세력들을 하나둘 탄핵하여 조정에서 축출하였고, 정몽주는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타살된다.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음력 7월 17일에 송경(松京.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다.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으나, 1393년 음력 2월 15일 조선(朝鮮)이라 고쳤다. 명나라에 책봉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지만 명나라의 홍무제는 그를 정식 국왕으로 봉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을 내린다.

 

이성계를 지지한 신진사대부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하고, 유능한 관리들로 하여금 벼슬길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고려 왕족 왕씨 일가를 배에 태운 후 강화도에서 배를 난파시켜 몰살시켰고, 특히 두문동의 72현을 비롯하여 고려의 유신들에게 개국공신과 그에 상응하는 개국원종공신의 지위를 내렸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거절하고, 낙향하거나 산으로 숨어버린다. 두문동에 모여 있던 고려의 옛 신하들이 마을에 불을 질렀는데도 한 사람도 나오지 않고 모두 타죽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새 왕조에 대한 반감이 어느정도로 심했는가를 알게 해주는 일화이기도 했다.(두문불출)
결국 태조는 지역의 민심과 사상적 기반을 달리 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읍지 천도와 국교(國敎)를 불교에서 유교로 개정할 결심을 한다. 1394년(태조 3년) 8월 태조는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으로 천도를 명령했다.(지금의 경복궁)

 

태조는 조선의 3대 기본 정책을 내세워 건국이념으로 삼아 조선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니,
정치적으로는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삼고 국호 및 왕위의 승인을 받아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며, 그밖에 다른 나라와 교린하는 사대교린정책을 썼고, 문화적으로는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으로 고려 말기의 부패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세웠으며, 경제적으로는 농본주의 정책으로 농업을 장려하고 전지(田地)를 개혁하여 농본민생주의에 따른 신분·사회 제도를 확립하였다.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몹시 사랑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한편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의 불만이 쌓였다.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방석을 끼고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이유를 들어 정도전 일파와 강씨 소생 왕자들을 살해했다.(1차 왕자의 난)

 

태조는 이방원에 매우 분개하였으며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으므로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유하니, 차사마저 돌려보내지 않고 죽였다는 전설이 있어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함흥에 있는 태조를 등에 업고 조사의가 방석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난을 일으키지만(1402년) 실패하고 태조는 뒤에 자초 무학대사가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다. 
만년에 불교에 전념 하다가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고,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의 건원릉(建元陵)이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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