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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History (Korea)/1392-1897 2016. 12. 12. 03:52


방촌 황희(黃喜, 1363~1452)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정치가로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상이다.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서, 재상 등을 지내며 맹사성 등과 함께 세종대왕을 잘 보필하였고, 관료생활 중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뇌물수수, 간통, 부패 등 좋지 않은 물의를 빚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기도 했다.

여러가지 비리와 이권 청탁의 의혹이 있었음에도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때문에 세종대왕의 신임을 받아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


- 황군서(黃君瑞)의 얼자로 송경(개성) 가조리에서 태어났다.

- 키가 크고 풍채가 잘 생긴 데다가 눈이 무섭게 생겼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함, 기억력이 크게 뛰어났다.

- 1376년(우왕 2년)에 음서 제도로 출사하였지만, 고려가 멸망하자 70여 명의 고려 유신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갔다.

- 이후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젊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으나 임금의 명령도 거부하는 완고함 때문에 여러번의 파직과 복직을 반복한다.

- 태종은 정승인 박석명의 추천 덕분에 황희를 중용하게 되고, 개국공신 대접 및 매일 불러 접견하는 등 특별히 그를 신임했다.

- 1418년(태종 18년) 양녕대군 폐위 후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국본을 쉽게 바꾼다며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폐서인되어, 교하(파주) 지방에 유배된다. 

- 남원에서 유배중 도교의 이치를 따라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광한루를 만들었다.

- 1422년(세종 4년) 세종은 황희가 자신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태종의 부탁 및 그의 사람됨을 보고 과감히 유배에서 불러들였다.

- 1431년(세종 13년) 69세 때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조선의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 조선의 건국 이념이 유교 성리학에 있음을 주장, 강력한 억불정책을 추진할 것을 건의했다.


김종서를 자신의 뒤를 이을 만한 차세대 인물로 인정하고, 급한 성품을 고쳐 준다는 이유로 일부러 김종서를 심하게 갈궜다고도 한다.

청백리로 알려진 반면, 의도적인 청렴함, 친인척 부패 옹호, 간통, 범죄자 은닉, 청탁 등의 논란이 많다. 이 정도 논란이면 청백리는 아닌걸로...

경기도 파주 문산읍 사목리에 황희선생 유적지가 있다. 방촌유적지, 반구정...



* 황희가 세종의 사랑을 받은 증거.


세종 13년 (1431년) 9월 10일 황희가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세종 14년 4월 20일 황희가 고령을 이유로 사직하자 허락하지 않다

세종 14년 12월 7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다

세종 17년 3월 29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전을 올려 노쇠함으로 사직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치 않다

세종 18년 6월 2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하나 윤허하지 아니하다

세종 20년 11월 19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을 청하니 허락치 않다

세종 21년 6월 11일 영의정 황희가 사직할 것을 청하다

세종 21년 6월 12일 황희의 사직을 반대하다

세종 22년 12월 21일 영의정부사 황희가 자신의 파면을 아뢰다

세종 25년 12월 4일 영의정 황희가 연로함을 이유로 해면을 청하나 듣지 않다


이 정도면 사랑이 아닌 집착...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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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은 조선의 제6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이고, 휘는 홍위(弘暐)이다.

 

1441년 문종과 현덕왕후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몸이 약한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 지 3일 만에 산욕으로 세상을 떠나고,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단종은 1448년 8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세종은 조선 5대 왕 문종이 병약한 이유로 일찍이 황보인·김종서·성삼문·박팽년·신숙주 등에게 왕세손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다. 1450년 단종은 문종이 즉위한 그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52년 문종이 병으로 승하하며,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어릴 때부터 매우 영리하였으나 혼자서 나랏일을 결정할 수가 없었고, 점점 정국이 불안해진 가운데 위축된 왕권과 달리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 등 종친의 세력이 나날이 팽창되어 갔다.

 

단종이 즉위하고 1년 만인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여 홍윤성·홍달손 등의 병력을 동원함으로 문종의 고명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김종서·정분 등을 죽이는 계유정난을 일으키게 된다. 곧이어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 사사시키며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수양대군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켰다.

 

1455년 단종은 한명회·권람 등의 강요에 못이겨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1456년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동모자인 김질의 고발로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 후 단종도 이 사건에 관련지어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다시 경상도 순흥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사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다시 강등이 되어 서인이 되었으며, 계속해서 자살을 강요당하다가 1457년(세조 3) 영월에서 죽었다. 사람들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시신을 방치했고 그 지역 호장으로 있던 엄흥도는 관을 비롯한 장례 기구 일체를 혼자서 마련하여 정중하게 장사를 치른 후, 벼슬을 내놓고 숨어 살았다.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죽음을 당한 이개, 하위지, 유성원, 성삼문, 유응부, 박팽년 등의 6명을 사육신(死六臣)이라 하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한 평생을 죄인으로 자처한 이맹전, 조여, 원호, 김시습, 성담수, 남효온 등 6명을 생육신(生六臣)이라 한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과 강봉은 200여 년 후인 1681년(숙종 7) 신원되어서 대군에 추봉되었으며, 1698년(숙종 24)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능은 단종이 목숨을 끊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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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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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도, 본관은 전주, 사후 묘호는 세종(世宗)이다.
재위 기간 동안 과학∙경제∙국방∙예술∙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세종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삼남으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유독 좋아하였다.
1418년 태종은 황희 등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첫째(양녕대군)의 심각한 비행을 이유로 왕세자에서 폐위시킨다.
뒤이어 셋째 충녕대군(세종)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충녕대군은 1418년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으로 즉위한다.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되어 있던 황희는 세종의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몰고 세종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지만 세종은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중용한다. 세종은 황희, 맹사성, 윤회 세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 국방 업무는 김종서에 위임하였고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 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그 외에도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집현전을 설치하고, 1443년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정인지(鄭麟趾), 정창손(鄭昌孫), 이개(李塏) 등의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3년여의 연구 끝에 훈민정음을 친히 창제하여 1446년 음력 9월에 이를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20세기에 들어 주시경 선생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었다. 또한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각종 천문 관측 기구와 시계, 측우기 등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

 

국방 정비 면에서는 1419년 이종무 장군 등에게 명하여 대마도에서 왜구를 정벌하고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여 삼포를 개항했다. 이 후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33년에는 최윤덕, 김종서 장군등의 여진족을 토벌을 지시하고, 평안도의 4군(四郡)과 함길도의 6진(六鎭)을 개척하게 하여 영토가 두만강 및 압록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

 

문종과 수양대군(세조),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의 자식이 있으며, 1442년부터 1450년 붕어할 때까지 아들 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세종은 죽어서도 부왕인 태종의 곁에 있고자 하였으나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손자인 예종 때에 경기도 여주로 이장되었고 능 이름은 영릉이다.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정인지·권제의 <용비어천가>, 정초·변계문(卞季文)의 <농사직설>, 정인지·김종서의 <고려사>, 설순(楔循)의 <삼강행실도>, 윤회·신장의 <팔도지리지> 등 각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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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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