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문동'에 해당하는 글 2건

 

 

 

 

원천석(元天錫, 1330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문인이다. 본관은 원주,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원주 원씨의 중시조이다. 두문동 72인중 1인이며, 태종의 어릴적 스승이었지만, 즉위 후에는 벼슬을 거절한다.

 

고려의 수절신으로 추앙받는 운곡 원천석은 고려 충숙왕 17년(1330년) 7월 8일 원주 원씨 시조인 원경(元鏡)의 19대손인 원윤적(元允迹)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있고 학문이 해박하여 진사가 되었다. 일찍이 이방원(태종)의 스승이 되었으며,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쥐자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벼슬을 내놓고 강원 원주땅의 치악산(稚岳山)으로 숨어서 젊은이들을 지도했다. 태종이 즉위한 후 그를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속으로 피해버렸다. 계속 도를 지키고 학문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태종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주고 원천석의 아들 '형(泂)'을 기천(지금의 영주) 현감으로 임명하였는데, 추세 사람들이 그 계석을 태종대(太宗臺)라 하였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 절에 있다.

 

시조로는 망한 고려 왕조를 회고한 것으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라는 <회고시> 1수가 전해온다. 그는 또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였으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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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즉위 초반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고려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해 힘을 썼다.
하지만 조선의 신민이 되기를 거부한 고려 유신들은 개성에 남아 남동쪽에 있는 '부조현(不朝峴)'이라는 고개에서 조복을 벗어 던지고 두문동에 들어 앉았다. 그 안에서 고려 유신 신규, 조의생, 임선미, 이경, 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등 72명이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빗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집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 이라고 하게 되었다.

 

결국 태조 이성계가 두문동을 포위하고 불을 지르게 하여, 72인은 모두 타죽거나 그 이전에 참살 당했다고 전해진다.
세종 때에 영의정을 지낸 황희도 이때 두문동에 있었으나 마음을 바꿔 관직에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개성에 남은 선비들은 100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명하였고, 살아남은 그들의 후손들은 결국 평민이 되거나 장사를 생업으로 삼게 되었다. 이들은 후에 '개성상인' 이 된다.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
이 두문동에 관한 일은 1809년(순조9)에 만들어진 <두문동실기> 에도 적혀 있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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