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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비로봉

Daily/Hiking 2019. 10. 27. 22:10

2019. 10. 26.


단풍 시즌이다. 지난주는 못나갔고, 다음주도 장담할 수 없고, 그나마 화창한 일요일이 보장되어 있는 이번주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단풍 시기' 로 검색해 보니 강원도는 지난주나 그 지난주에 이미 끝이 났고 이번주 핫한 곳은 월악산이었다. 하지만 월악산은 생각보다 가까워서 이번처럼 비장하게 다짐했을 때는 되도록 먼곳을 가보고 싶었다. 대중교통으로도 가기 힘든! 그렇게 결심한 곳이 바로 주왕산이었다. 하지만 청송까지 가서 주왕산만 보고 오기는 좀 그렇고 하루 더 빼서 가는 길에 가볼 만한 산을 검색해 봤다. 후보는 소백산과 청량산이었는데 소백산으로 결정했다. 비로봉에서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길과 운해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금요일에 퇴근하고부터 새벽 1시까지 1박2일 일정을 짜고 준비물을 챙겼다. 2시간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났는데 여행가는 기분이라 그런지 전혀 피곤하지 않았고 30분간 준비물 점검한 뒤 소백산의 삼가매표소로 달렸다. 초승달이 어딘지 음산해 보였지만 신나는 음악과 함께 안전하고 빠르게 달려 5시50분경 도착했다. 또 주차장에는 나 혼자였다. 운악산에서의 새벽 등반이 트라우마로 남아서 조금이라도 빛이 보이기 전까진 차에서 내리지 않는다.ㅋㅋ 보통 일출 시간 30분 정도 전부터 환해지더라. 아무튼 동틀무렵인 6시 10분 경 등산스틱, 보조충전기, 에너지바, 물만 챙겨 언제나처럼 가볍게 등반을 시작했다. 오늘의 이곳 날씨는 약 2시간 전까지 비가 왔고 7시까지 구름 조금, 8시부터 완전 맑음 이었다. 




오늘의 목표 코스는  [삼가매표소 - 비로사 - 비로봉 - 국망봉 - 석륜암계곡 - 비로사 - 삼가매표소]  로 한바퀴 도는데 6시간 정도를 계획했었다. 등산로를 진입하고 금새 날이 밝아오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겁이 엄청 많아졌음;) 또 아직은 안개때문에 정상의 상태는 알 수 없었지만 곧 지금보다 더 좋아질 것 같았다. 올라가면서부터 왼편에 계곡물이 흐르는데 언뜻 보기에 여느 계곡들과 흡사하게 생겼는데 여기 계곡물은 어찌나 그 소리가 활기차고 우렁찬지... 낙폭이 크지도 않은데 시종일관 콸콸콸콸~ 단풍은 대부분 가까이서 보면 볼 수록 마르고 병든 것 같아 멀리서만 지켜보는 걸로... 비로사도 사람들 꼬이기 전에 하산하는 길에 보는 걸로~ 그렇게 1빠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차 몇대가 왼쪽길로 신나게 올라가더니 주차금지 팻말앞에 떡하니 주차하고는 등산스틱을 챙겨 내 앞을 걸어가는것이 아닌가. 이런 양심없는 노인네들. 속도를 올려 더 앞에 주차하고 올라가는 노부부까지 다 제꼈다.


내가 새벽같이 등산을 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1. 사람 없는 풍경을 찍고 싶음. (정당하게 나 보다 먼저 올라간 사람은 인정. 비박포함.)

2. 좁은 길에서 사람들 잘못마주치면 수십명 지날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음.

3. 일찍 등산하고 차 안막힐 때 귀가하고 싶음.




아무튼... 조금더 올라가면 달밭골이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주로 민박, 매점 같은... 역시 제끼고 나면 이제부터 비로봉까지 오르막이 시작된다. 내 기억에 경사에 차이는 있지만 내리막은 없다. 달밭골까지가 약 40분 걸렸고 비로봉까지 약 1시간 20분을 계속 올라야 한다. 언제나처럼 슬~슬~ 올라간다. 첫번째 해와도 반갑게 마주치고 아직까지도 주변 산은 안개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때도 곧 좋아질 것 같았다. 1시간쯤 올라 비로봉이 0.8km 남았을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바람도 엄청 쎄졌고 나무에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있었으며 땅과 나무가 점점 촉촉해져갔다. 이 때까지만 해도 춥다며 동영상을 찍는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보이는가. 이 아무것도 안보이는 배경이. 이 얼어죽을 안개가 이렇게 겐세이를 놓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제 2의 한라산 사태다. 한라산은 원래 비가 오는 날이었으니 그렇다 치는데 이건 왓더... 문제는 미친듯한 칼바람. 이 때 기온이 영상 8도 였는데 체감 온도는 영하 5도는 됐다. 핸드폰 촬영하느라고 20초정도 장갑을 벗었는데 한 겨울에 눈속에서 꺼낸 것처럼 시뻘겋게 변해버렸는데 바람이 멈추지 않으니 더는 버틸수가 없었다. 빨리 국망봉쪽으로 향하려는데 문제는 그 바람들이 전부 국망봉풍이었다. 일단 조금 참아보려는 생각에 비로봉 안내판 뒤에 숨어서 10분정도 스쿼트와 런지를 했다. 체온이 이미 너무 떨어져있어서 가만히는 버틸수가 없었다. 근데 영하 5도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는데 저게 도움이 될 턱이 있나. 그 사이 50대 정도의 양심없는 노인네들이 모두 올라왔고 난 그들을 피해 다시 국망봉으로 향하려다가 바람만 쳐맞고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정말 포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건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빨리 그곳을 빠져나와 내려오는 길에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다. 이게 뭐지. 어떻게 저 꼭대기에만 저렇게 세찬 바람이 불지. 다시 비로봉이 0.8km 남은 곳에서 엄청나게 고민을 했다. '여기서 좀 기다리다가 다시 올라가볼까. 다시 올라갔는데도 그대로면 어떡하지. 오전 8시가 넘었고 완전 맑음이어야 하니 30분만 더 기다려볼까. 오늘 못보면 여길 또 언제 와보지. 비로봉 능선 꼭 사진찍고 싶었는데. 그 안개낀 상태로 2초 정도 본게 전부인데. 추위는 정말 어쩔수가 없다. 포기하고 내려가자.' 하고 회귀를 시작했다.




내려오는 길은 또 말도 안되게 햇빛도 비치고 하늘도 맑았다. 하지만 비로봉엔 여전히 안개가 머무르고 있었다. 올라오는 사람들도 뭔가 알고 있었는지 비로봉 상태를 계속해서 물어봤다. 아무것도 안보이고 너무 추워서 버티지 못하고 내려왔다는 말만 반복하며 비로사까지 내려왔다. 그곳에서 보이는 비로봉은 너무도 맑고 청명해서 빡이 돌기 시작했다. 일찍 일어나는 새에게 이렇게 엿을 먹이는 법이 어딧냐며 비로사에서 욕만하다 온 듯하다. 청량산 갈껄 ㅅㅂ... 그럴 수 있다. 일출도 못볼 수 있고 정상에서의 장관도 못볼 수 있다. 그래서 예보란 것이 있는 것이고 내 잘못이라면 딱 그 시간에 비로봉의 기상과 풍속을 확인하지 못한게 죄라면 죄. '어짜피 오늘 소백산 너는 내일을 위한 미끼였을 뿐이다. 주왕산 가던길에 들른것 뿐이니 도도한척 말거라.' 라고 헛소리를 지껄이고는 주왕산으로 향했는데, 비로봉에서 순간순간 0.5초 정도씩 보이던 운해가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ㅜ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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