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에 해당하는 글 2건

 

 

 

공민왕(고려31) - 우왕(고려32) - 창왕(고려33) - 공양왕(고려34).

 

공민왕과 공양왕 사이에 낀 우왕과 창왕은 정통인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돈의 아들인 신씨(辛氏)라는 주장으로 인해 폐위까지 이른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폐가입진(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들임)'을 내세워 우왕과 창왕을 내몰아 죽이게 되는데, 우왕의 출생배경을 돌아보면 이러하다.

 

신돈에게 '반야'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자식이 없어 고민하는 공민왕에게 바쳐 아들인 우왕을 낳게 되는데, 우왕은 출산부터 어린 시절을 신돈의 집에서 보내게 되고, 7살이 되던 해(공민왕20년)에 궁궐에 입성하게 된다. 공민왕은 우왕의 정통성 논란을 예견하고, 우왕은 이미 죽은 궁인 한씨의 아들이라 발표하였는데 공민왕이 죽은 뒤 우왕 2년에 '반야'가 우왕의 생모임을 주장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어릴적 궁에서 자라지 않았던 점에 의해 의혹이 생기게 된다.
이성계 일파는 반야가 신돈의 여종임을 근거로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이 신돈의 후예라 주장하며 조선의 개국을 합리화시킨다. 조선의 학자들이 편찬한 정사인 《고려사》에는 반야를 신돈의 첩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 내용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우왕과 창왕의 신돈 후손설은 조광조가 비판한 후 송시열이 재비판하였고, 그 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신돈 후손설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조작한 설로 인정되었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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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기 1388년(우왕14) 음력 5월, 요동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이른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개경으로 회군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신/구 세력의 교체가 진행되어 고려 충신인 최영이 축출되고 신진사대부와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창건하는 기초적 계단이 확립되었다.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이 과거 원나라 때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있었던 철령(鐵嶺) 이북 지역의 고려 지역 반환을 요구해왔다. 마찬가지로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요동 지역이 원래 고려의 영토였는데 우왕은 이에 요동정벌을 결심하였고, 이성계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하며 요동정벌을 반대하였지만, 최영에 의해 강행된다. (최영은 우왕의 장인이기도 하다.)

 

* 4불가론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
둘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셋째,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넷째,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우왕은 서경(평양)에서 최영을 팔도도통사,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다. 조민수와 이성계가 원정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여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도착하였는데, 큰비로 인해 강물이 범람하고 사졸(士卒)중 환자가 발생하게 되자 진군을 중단하였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상의하여 요동까지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의 운반이 곤란하다는 등을 우왕께 올리며 회군을 청하였다. 하지만 평양에 있는 우왕과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속히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성계는 조민수와 결의하여 왕명을 어기고 결국 회군을 결심하였고, 돌연한 회군에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서 개경으로 급히 귀경하였다. 최영은 개경에 당도한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고양)에 유배하였다가 처형하였으며, 우왕을 폐위시키고 강화도로 유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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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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