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Korea)/1392-1897'에 해당하는 글 15건

<헌릉 앞 문무석상>

 

 

태종(1367~1422, 재위1400~1418)은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고려의 문신을 거쳐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왕자의 난을 거쳐 조선의 제3대 왕이 된 인물이며, 비는 민제의 딸 원경왕후이다.

 

성은 이(李), 휘는 방원(芳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유덕(遺德)이다. 태조의 아들들이 대개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이방원은 무예나 격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과거 급제를 하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자 아버지를 도와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한다.
1391년 모후 한씨가 사망하자 시묘살이를 하다가 정몽주가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움직임 때문에 계모 강씨의 명으로 시묘살이를 중단하고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제거하였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이방원은 정안공에 봉해졌고, 정도전과 신덕왕후의 추천에 의해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우게 되면서, 태조, 신덕왕후, 정도전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후에 왕자의 난 등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정종에 이어 조선 3대왕이 된 후, 죽은 신덕왕후를 왕후가 아닌 후궁으로 격하시켰고 서자 및 서얼들의 관직임용 제한 규정을 만들어 이 규정은 1894년까지 지속된다. 부왕 태조의 능을 경기도 양주군 구리에 안장하고, 태조가 특별히 가까이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 정릉은 도성 밖으로 이장을 명한다.

 

태종은 조선 초기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관제 개혁을 통한 왕권 강화와 유교 정치에 온 힘을 쏟았다.
사병 혁파로 병권 일원화, 토지제도와 조세제도 재정비, 척불숭유 정책으로 사찰 정리,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의정부와 6조의 관료들이 왕에게 직속되어 정무를 다스리도록 하였고,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직접 풀어주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다시 옮겼고 창덕궁, 덕수궁, 경회루, 청계천을 조성하였다.

 

자신을 등극하게 만들어준 공신들을 유배보내거나 처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세종 때에는 조선이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군사적 발전을 이루게 될 수 있었다. 이거이 부자, 이숙번을 유배시키고, 아내인 원경왕후를 유폐시킨 후 왕비 민씨의 외척들을 유배시키거나 교살시켜 어떠한 정치적 개입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이 왕이된 후에는 며느리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도 태종에 대한 불경죄로 숙청한다.

 

태종의 첫째 아들 양녕대군은 왕세자인데도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고, 자유분방한 활동과 기생을 좋아하여 폐위되고,
둘째 아들 효령대군은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될 것을 알고는 불가에 관심을 갖다가 후일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양녕대군을 폐위하는데 반대하는 신하들은 외지로 유배되었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아 후에 세종대왕이 된다.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도 그는 4년간 줄곧 국정을 감독하였고,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422년 태종은 보름이 넘게 병석에 있다가, 세종, 양녕, 효령 등 아들과 후궁과 그 자식들, 그리고 신하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태종의 능은 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이다. 원경왕후의 능과 함께 쌍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 자료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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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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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왕자의 난

 

태조 7년(1398년) 음력 8월 태조의 이복 형제 간의 싸움. (방원의 난 / 무인정사 / 정도전의 난)

 

태조에겐 정비인 한씨(신의왕후: 6남) · 계비인 강씨(신덕왕후: 2남), 두 명의 정처가 있었다.
강씨의 집안 배경 및 강씨의 두터운 인맥과 지모의 도움으로 개국왕에 큰 바탕이 되어, 정비로 삼고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한씨의 5남 이방원 역시 부왕의 창업을 도와 공로가 큰지라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398년(태조 7) 음력 8월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비밀리에 모의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이유로 여러 왕자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하려 한다며, 방석 · 방번 · 정도전 일파를 살해했다.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는 과정에서 이방원은 야심이 없던 둘째형 이방과(정종)에게 왕의 자리를 양보하고, 아우들을 살해한 주동자로써의 책임을 떠맡기는 형국이 된다.

 

 

제2차 왕자의 난

 

정종 2년(1400년) 태조의 동복 형제 간의 싸움. (방간의 난 / 박포의 난)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은 인격·공훈·위세가 방원에 미치지 못하여 항상 시기하고 의심하며 불안해 하고 있었다.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난을 성공적으로 이끈 지중추(知中樞) 박포는 상작이 높지 못한데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넷째 이방간이 왕세제 자리를 넘보고, 박포와 손을 잡아 난을 일으켰지만 이 역시 이방원이 승리로 이끈 후 이방간을 유배시키고 박포를 처형하였다.
이후 이방원은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으며, 아울러 2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그 해(1400년) 음력 11월 정종에게 왕위를 넘겨받고 이방원은 조선의 제3대 왕(태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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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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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1335~1408)는 고려 말의 무신이자 조선의 초대 왕(1392~1398)이다.
성(姓)은 이(李), 본관은 전주, 휘는 단(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晋), 호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이다. 원나라 쌍성총관부에 속해있던 함경도 영흥 흑석리에서 환조 이자춘과 의혜왕후 최씨의 적자로 태어났고, 아버지 이자춘은 원나라의 다루가치를 지내다가 원나라가 쇠퇴하자 고려에 귀화했다.

 

고려 공민왕(1356: 공민왕5)때부터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우며 변방의 무명 장수에서 일약 고려 제일의 장수가 되었다.
계속되는 승전은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벼슬도 올라갔다. 군사력을 갖춘 신망받는 이성계에게는 자연히 신진사대부들이 몰려들었고, 이론과 정치적 연고가 부족하던 그는 신진사대부와 연대하여 정몽주, 정도전, 이색, 성석린, 최영, 조민수 등과 결속력을 다져나갔다.

 

1388년 2월 명나라가 철령(강원도 안변) 이북의 땅을 점령하겠다는 통고를 하자 최영은 반발했고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명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이자고 하였다. 최영과 우왕(1388년)은 명나라 기지인 요동 정벌을 주장했지만,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하였다.
결국 1차 요동정벌이 단행되었고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개경으로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하고 최영을 제거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은 조선왕조가 개창되는 단초를 이룬 사건이며, 정도전 · 정몽주 등의 적극적인 찬성과 지지 덕에 내부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 등의 역성혁명파(급진개혁파)를 이끌고 신 왕조를 수립할 계획(쿠데타)을 세우자, 고려에 충성하던 이색, 정몽주는 이성계의 적(온건개혁파)이 된다. 정도전을 통해 이색과 정몽주 등의 구세력들을 하나둘 탄핵하여 조정에서 축출하였고, 정몽주는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타살된다.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음력 7월 17일에 송경(松京.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다.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으나, 1393년 음력 2월 15일 조선(朝鮮)이라 고쳤다. 명나라에 책봉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지만 명나라의 홍무제는 그를 정식 국왕으로 봉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을 내린다.

 

이성계를 지지한 신진사대부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하고, 유능한 관리들로 하여금 벼슬길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고려 왕족 왕씨 일가를 배에 태운 후 강화도에서 배를 난파시켜 몰살시켰고, 특히 두문동의 72현을 비롯하여 고려의 유신들에게 개국공신과 그에 상응하는 개국원종공신의 지위를 내렸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거절하고, 낙향하거나 산으로 숨어버린다. 두문동에 모여 있던 고려의 옛 신하들이 마을에 불을 질렀는데도 한 사람도 나오지 않고 모두 타죽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새 왕조에 대한 반감이 어느정도로 심했는가를 알게 해주는 일화이기도 했다.(두문불출)
결국 태조는 지역의 민심과 사상적 기반을 달리 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읍지 천도와 국교(國敎)를 불교에서 유교로 개정할 결심을 한다. 1394년(태조 3년) 8월 태조는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으로 천도를 명령했다.(지금의 경복궁)

 

태조는 조선의 3대 기본 정책을 내세워 건국이념으로 삼아 조선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니,
정치적으로는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삼고 국호 및 왕위의 승인을 받아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며, 그밖에 다른 나라와 교린하는 사대교린정책을 썼고, 문화적으로는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으로 고려 말기의 부패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세웠으며, 경제적으로는 농본주의 정책으로 농업을 장려하고 전지(田地)를 개혁하여 농본민생주의에 따른 신분·사회 제도를 확립하였다.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몹시 사랑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한편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의 불만이 쌓였다.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방석을 끼고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이유를 들어 정도전 일파와 강씨 소생 왕자들을 살해했다.(1차 왕자의 난)

 

태조는 이방원에 매우 분개하였으며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으므로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유하니, 차사마저 돌려보내지 않고 죽였다는 전설이 있어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함흥에 있는 태조를 등에 업고 조사의가 방석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난을 일으키지만(1402년) 실패하고 태조는 뒤에 자초 무학대사가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다. 
만년에 불교에 전념 하다가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고,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의 건원릉(建元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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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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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 있는 화성은 '성곽의 꽃'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답고 우수한 기능을 갖춘 조선 후기(1796 : 정조20년) 성곽입니다.
사적 제3호이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사실 원본이 아닌 복원 흔적이 있는 문화재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화성 성곽은 6·25때 포탄을 맞아 파괴되었는데, 순조때 발간된 화성 건축 종합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 를 보고,
완전 복구를 한 것에 대해 수긍하고 등재를 허가했다고 합니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자리를 경기도 화성의 융릉으로 선택하고,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새 도시로 이주시키고 그 전체를 둘러쌓은 성이 바로 지금의 수원 화성입니다.
정약용이 설계하고(성설), 영의정이던 '채제공'이 공사하였습니다.
남문을 정문으로 하는 대부분의 성과는 달리 화성의 정문은 북문인데 이유는,
정조가 서울에서 출발해 오면 북문이 가장 먼저 맞이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능>
기존 화강암 방식에서 벽돌로 쌓았고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 유형거, 녹로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화강암은 벽돌보다 단단하지만 포탄에 맞을 경우 주변이 다 무너져 내리기 때문에 벽돌로 축성했습니다.
정문인 장안문(북)은 밖에 반원형으로 둥글게 성벽을 쌓아 성문을 보호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 옹성 위에는 물구멍이 다섯 개가 있어서 적군이 나무인 성문에 불을 지르면 이 곳으로 물을 흘려 껏습니다.
그 외에도 돈대의 총구, 쇠뇌를 쏘는 서노대, 봉돈, 적대, 포루 등 성을 보호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벽체석연의 십자가들, 홍수를 대비해 세워진 화홍문의 무지개 모양 수문은 수원팔경 중 하나입니다.

 

 

 

*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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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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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 사암이 누군가 해서 봤더니, 다름아닌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입니다. 정약용은 다산인데...
정약용이 거중기를 만들고 목민심서를 썼다는 기억은 있지만, 왜 조선혁명가라고 하는지도 궁금하구요.

 

사암(俟菴)은 기다릴사(俟), 집암(菴) 회갑때가 되어 지은 호이며 다음 시대를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생전의 자기의 정신, 자기의 학문 업적을 알아줄 사람이 없어 다음 시대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는,
뭔가 안타까움이 묻어있는 듯한 호였네요.

 

정약용은 조선 22대왕인 정조(이산, 1776~1800) 때의 문신으로, 학문이 뛰어나 일찍부터 많은 벼슬을 거치며 중농주의 실학을 주장하였고, 거중기를 고안하여 수원 화성을 쌓는데 이용하는 등 농사, 과학기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왔지만 정조가 승하(1800)하자 남인과 소론등의 시파들을 축출하는 정순왕후 김씨의 신유박해(천주교 탄압)에 연루되어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18년간 유배됩니다.
이 유배 기간에 성리학, 천문, 지리, 사회, 경제, 사상등을 다룬 '1표 2서' 등 500여권 이상의 저작들을 출간하였습니다.
'1표 2서'라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는 정약용의 주요 저서로 꼽힙니다.

 

 

<목민심서>는 목민-백성을 다스림, 심서-마음으로 올리는 글, 이란 뜻으로 차마 입밖으로 내지 못할 생각을 적은 책입니다.
조선 후기 지방관의 자질과 실제 행정에 관한 지침을 기록한 책으로 부정부패를 뿌리뽑아야 한다고 성토하였기 때문에 정약용도 생전에 목민심서가 이 세상에 나오기를 두려워 하였습니다.
결국 목민심서는 조선 25대 왕인 철종 때에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과 민란의 해결책으로 노사 기정진이 추천하여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 뒤로 이 목민심서는 공직자 윤리의 교과서가 됩니다.
다산이 말하는 목민심서의 애민(愛民)은 단순히 일반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독거노인, 어린이, 병든자, 이재민...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특히 복지정책을 제시하였습니다.

 

<경세유표> 역시 경세-나라를 다스림, 유표-죽을 때 쯔음에 올리는 글, 이란 뜻으로 지금은 숨겨놨다가 죽은 후에 올리라는 책입니다.
관제·토지제도·부세제도 등 모든 제도를 뜯어 고치자는 개혁 원리를 제시한 책입니다.
특히 정전제(토지제도)를 내세워 불평등한 토지분배 문제와 지나친 세금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정약용은 한나라 이후 유학의 병폐·타락을 지적하고,
공자에게로 돌아가 보다 합리적이고 건전하며 실제적인 신유학(新儒學)을 건설하여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한 주체적·혁명적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약용의 흔적은 대표적으로 출생지인 남양주(다산유적지)와 유배지인 전남 강진(다산초당)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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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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