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Korea)/918-1392'에 해당하는 글 6건

 

 

 

 

원천석(元天錫, 1330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문인이다. 본관은 원주,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원주 원씨의 중시조이다. 두문동 72인중 1인이며, 태종의 어릴적 스승이었지만, 즉위 후에는 벼슬을 거절한다.

 

고려의 수절신으로 추앙받는 운곡 원천석은 고려 충숙왕 17년(1330년) 7월 8일 원주 원씨 시조인 원경(元鏡)의 19대손인 원윤적(元允迹)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있고 학문이 해박하여 진사가 되었다. 일찍이 이방원(태종)의 스승이 되었으며,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쥐자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벼슬을 내놓고 강원 원주땅의 치악산(稚岳山)으로 숨어서 젊은이들을 지도했다. 태종이 즉위한 후 그를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속으로 피해버렸다. 계속 도를 지키고 학문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태종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주고 원천석의 아들 '형(泂)'을 기천(지금의 영주) 현감으로 임명하였는데, 추세 사람들이 그 계석을 태종대(太宗臺)라 하였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 절에 있다.

 

시조로는 망한 고려 왕조를 회고한 것으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라는 <회고시> 1수가 전해온다. 그는 또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였으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

 

 

공양왕은 정몽주 마저 죽은 뒤 이성계가 자신을 해할 것이라 생각하여 신하인 시중 이성계와 동맹 맺을 계획을 세운다.
1392년(공양왕4년) 7월 공양왕은 이방원을 불러 이성계와 동맺을 맺으려 하니 맹세의 글을 받아오도록 지시한다.
이에 이성계는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희가 주상의 말씀에 따라 기초해 보도록 하라." 고 하자 다음과 같이 초안을 작성했다.

 

"경이 없었으면 내가 어찌 이 자리에 앉았겠는가? 그러니 경의 공덕을 내가 어찌 잊으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곁에 있으니 자손대대로 서로 해치는 일이 없을 것이로다. 내가 경을 저버리는 일이 있을 경우 이 맹세가 증거가 될 것이다."

 

 

이 초안을 왕에게 올리니, 왕이 좋다고 했다.
공양왕은 며칠뒤 이성계의 집에으로 가서 술자리를 마련하고 동맹식을 거행하려 했으나,
이미 우시중 배극렴 등이 의장대와 경호병을 데리고 왕대비 안씨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건의(강요)했다.
"현재의 왕은 용렬한 사람이라 군왕의 자격을 상실했고 인심마저 떠나 나라와 백성들의 주인이 될 수 없으니 그를 폐위시켜 주소서."
결국 공양왕은 계획했던 동맹도 맺지 못하고 왕대비의 시지에 따라 폐위가 결정되어 고려는 475년 만인 1392년에 결국 멸망하게 된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

 

 

1392년(공양왕 4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왕석)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눕게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고려 충신 정몽주는 이를 기회삼아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일파의 핵심 인사들을 모두 귀양을 보내지만 이방원이 이성계를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여 무산된다. 이방원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하였다.

 

정몽주는 문병차 이성계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이방원은 회유의 시조 <하여가>에 <단심가>로 거절한 정몽주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결국 정몽주는 귀가길에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살해된다. 정몽주가 살해되기 전 귀가하며 친구 집에 들려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탔는데 마부가 이유를 물으니,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직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 라고 답하였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집을 방문하기 전에 이미 변중량을 통해 이방원의 살해 계획을 입수하였다고 한다.

 

이성계는 이 사건으로 인해 아들 이방원에게 다음과 같이 책망하였다고 한다.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가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이렇게 불효한 짓을 감히 하니 내가 사약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이렇게 역성혁명을 저항하는 마지막 고려 충신 정몽주가 죽음으로써 이성계는 곧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조선을 건국한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

 

 


윤이·이초의 옥사, 윤이·이초 사건, 윤이·이초의 무고 사건.
고려시대 최후의 임금 공양왕 2년(1390)에 고려 무신 윤이(尹彛)와 이초(李初)가 이성계 일파의 정변을 막기 위해, 명나라 주원장에게 무고(거짓으로 보고함)한 사건이다.

 

- 공양왕과 이성계가 공모하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
- 이를 반대한 이색 등 고려 재상 19인이 살해/감금/유배 될 것이다.
-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친(姻親)이다.
- 이성계는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다.

 

어색한 무고로 명나라로 하여금 시중 이성계를 없애려 하였지만, 이성계의 측근 정도전이 명나라로 가서 해명하며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 사건을 계기로 반대 세력인 고려 유신 10여명(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양촌 권근, 인재 이종학, 우현보... )을 제거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고려 유신들을 청주 옥사에 하옥한 후 윤이와 이초 사건에 연루되었는지 조사하였으나 증거를 찾지 못하였다.
결국 윤이와 이초만 유배시키고 사건이 마무리 되면서 모두 석방하였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

 

 

 

공민왕(고려31) - 우왕(고려32) - 창왕(고려33) - 공양왕(고려34).

 

공민왕과 공양왕 사이에 낀 우왕과 창왕은 정통인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돈의 아들인 신씨(辛氏)라는 주장으로 인해 폐위까지 이른다.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폐가입진(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들임)'을 내세워 우왕과 창왕을 내몰아 죽이게 되는데, 우왕의 출생배경을 돌아보면 이러하다.

 

신돈에게 '반야'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자식이 없어 고민하는 공민왕에게 바쳐 아들인 우왕을 낳게 되는데, 우왕은 출산부터 어린 시절을 신돈의 집에서 보내게 되고, 7살이 되던 해(공민왕20년)에 궁궐에 입성하게 된다. 공민왕은 우왕의 정통성 논란을 예견하고, 우왕은 이미 죽은 궁인 한씨의 아들이라 발표하였는데 공민왕이 죽은 뒤 우왕 2년에 '반야'가 우왕의 생모임을 주장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어릴적 궁에서 자라지 않았던 점에 의해 의혹이 생기게 된다.
이성계 일파는 반야가 신돈의 여종임을 근거로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이 신돈의 후예라 주장하며 조선의 개국을 합리화시킨다. 조선의 학자들이 편찬한 정사인 《고려사》에는 반야를 신돈의 첩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 내용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우왕과 창왕의 신돈 후손설은 조광조가 비판한 후 송시열이 재비판하였고, 그 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신돈 후손설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조작한 설로 인정되었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