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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부여(기원전 2세기 ~ 494년)는 삼국시대 한민족(예맥족)의 고대국가로 여겨지는 초기 국가(연맹 왕국)들 중 하나이다.
철기 문화 시대에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북만주 일대까지 지배하였고 일반적으로 '북부여'라고도 한다.
부여라는 명칭은 다양하다.

 

  • 부여 - 부여족의 동명왕이 건국
  • 북부여 - 동명왕을 계승하여 훗날 천제 해모수가 건국
  • 동부여 - 동명왕 때에 북부여 땅을 빼앗긴 해부루가 동부 연해주로 이동해 건국 (북옥저 지역)
  • 졸본부여 - 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해 고구려 건국의 기초를 다짐 (요동 지역)
  • 남부여 - 백제 성왕이 538년 백제에서 국호를 바꿈

 

왕의 권한이 약하여 가뭄이나 장마로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왕을 바꾸거나 죽이기도 하였다.
신분계급은 왕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의 지배층이 있었다.
전국을 5부로 나누어 하나의 중앙은 왕이 직접 다스리고 나머지 구획인 사출도(四出道)를 4가(加)가 각기 맡아 다스렸다.
풍속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와, 지배층이 죽으면 신하와 아내, 종을 함게 묻는 순장, 일부다처제 등이 행해졌다.
3세기 후반부터 남쪽 고구려와 서쪽 선비족에 의해 여러 차례 공격을 당하였고 쇠약해진 부여는 결국 고구려에 복속(494)되었다.

 

 

옥저

 

옥저(기원전 2세기 ~ 서기 3세기)는 함경남도 영흥 이북에서 두만강 유역 일대에 걸쳐 있었던 종족과 읍락 집단을 가리킨다.
함흥일대 중심의 동옥저와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로 나뉜다.
위만조선, 한군현, 고구려로 이어지는 외부세력에 의한 지배와 수탈로 사회의 성장과 발전이 억제되었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민며느리제가 있었고, 묘제도 가매장 후 가족공동묘(목곽)에 묻는 골장제가 있었다.
56년에 고구려에 복속되었으나, 244년 위나라 군대에 큰 피해를 입어 사실상 옥저는 소멸되고 고구려의 직접지배가 이루어졌다.

 

 

동예

 

동예(기원전 3세기 ~ 3세기)는 한반도 동해안 일대에 자리잡았던 한민족의 초기 고대국가의 하나이다.
예(濊)라고 불렸으나, 넓은 의미의 예와 구별하기 위해 통상 '동예'라고 부르며 '동쪽에 있는 예족'이라는 뜻이다.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를 접하고,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하였다.
산과 하천을 경계로 읍락이 구분되어 각 읍락을 삼로(三老)가 통치했다.
동성간에는 혼인을 하지 않았고(족외혼), '무천'이라는 제천행사가 있었다.
옥저와 마찬가지로 한의 군현으로 있다가 후한(後漢) 말에 고구려에 복속했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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