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해 이사금 (脫解尼師今, 기원전 19년~80년, 재위: 57년~80년)은 신라의 제4대 국왕이다. 성(姓)은 석(昔)이고, 휘는 탈해(脫解)로 석씨로서는 첫 왕이다. 용성국(龍城國)의 왕과 적녀국(積女國)의 왕녀 사이에 태어난 알이 궤짝에 담겨 표류하다가 BC 19년 아진포에서 한 노파가 발견, 기른 것이 후에 탈해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1845년에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에 아진포로 추정되는 곳에 세워진 비각(신라 석탈해왕 탄강 유허비각)이 있다.
서기 8년에 남해 차차웅(2대왕)의 사위가 되며, 10년에 대보(大輔)로 등용되어 정사를 맡았다. 57년 3대왕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왕이 되었고, 즉위 후 백제를 자주 공격했으며 일본과는 화친했다.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어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개칭하여 국호로 정하고 주(州), 군(郡)에 관직을 새로 만들었다. 77년 황산진에서 가야와 싸워 크게 이겼다. 사후 그를 모시는 숭신전이 세워졌으며 1980년 경주시 동천동 탈해왕릉 앞으로 옮겨졌다.
24년, 남해 차차웅이 죽자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어 왕위를 사양하였다.
57년,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왕이 되었다.
58년, 봄 정월에 호공을 대보로 삼았다.
59년, 왜와 수교하였다.
61년, 마한의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바치고 항복했다.
64년, 음력 8월에는 백제가 와산성(蛙山城)을, 음력 10월에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했으나 기병 2천명을 내어 쫓았다.
65년, 시림에서 김알지를 얻고 시림을 계림으로 개칭한 뒤 계림을 국호로 삼았다.
66년, 백제는 다시 와산성을 빼앗고 수비병 2백을 주둔시켰으나 신라는 곧 다시 빼앗았다.
67년, 봄 정월에 박씨의 귀척으로써 나라 안의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는데, 이름을 주주(州主)·군주(郡主)라 하였다.
73년, 왜인이 목출도를 침범해 각간(角干) 우오(羽烏)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우오는 전사하였다.
75년,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어서 진휼하였다.
77년, 음력 8월에 아찬 길문(吉門)이 황산진 어구에서 가야군과 싸워 1천 기를 베었다.
80년, 가을 음력 8월에 죽어 성 북쪽의 양정구에 장사지냈다.
* 탈해는 왕위에 오른 이듬해 자신이 집을 빼앗았던 호공을 대보에 앉혔다.
* 신라의 수도인 반월성 북쪽에 위치한 숲(시림)에 황금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어 열어보았더니 어린 사내아이가 누워 있었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
WRITTEN BY
-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