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왕후'에 해당하는 글 2건

<헌릉 앞 문무석상>

 

 

태종(1367~1422, 재위1400~1418)은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고려의 문신을 거쳐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왕자의 난을 거쳐 조선의 제3대 왕이 된 인물이며, 비는 민제의 딸 원경왕후이다.

 

성은 이(李), 휘는 방원(芳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유덕(遺德)이다. 태조의 아들들이 대개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이방원은 무예나 격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과거 급제를 하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자 아버지를 도와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한다.
1391년 모후 한씨가 사망하자 시묘살이를 하다가 정몽주가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움직임 때문에 계모 강씨의 명으로 시묘살이를 중단하고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제거하였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이방원은 정안공에 봉해졌고, 정도전과 신덕왕후의 추천에 의해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우게 되면서, 태조, 신덕왕후, 정도전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후에 왕자의 난 등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정종에 이어 조선 3대왕이 된 후, 죽은 신덕왕후를 왕후가 아닌 후궁으로 격하시켰고 서자 및 서얼들의 관직임용 제한 규정을 만들어 이 규정은 1894년까지 지속된다. 부왕 태조의 능을 경기도 양주군 구리에 안장하고, 태조가 특별히 가까이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 정릉은 도성 밖으로 이장을 명한다.

 

태종은 조선 초기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관제 개혁을 통한 왕권 강화와 유교 정치에 온 힘을 쏟았다.
사병 혁파로 병권 일원화, 토지제도와 조세제도 재정비, 척불숭유 정책으로 사찰 정리,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의정부와 6조의 관료들이 왕에게 직속되어 정무를 다스리도록 하였고,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직접 풀어주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다시 옮겼고 창덕궁, 덕수궁, 경회루, 청계천을 조성하였다.

 

자신을 등극하게 만들어준 공신들을 유배보내거나 처형하여 왕권을 강화하였고, 세종 때에는 조선이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군사적 발전을 이루게 될 수 있었다. 이거이 부자, 이숙번을 유배시키고, 아내인 원경왕후를 유폐시킨 후 왕비 민씨의 외척들을 유배시키거나 교살시켜 어떠한 정치적 개입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이 왕이된 후에는 며느리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도 태종에 대한 불경죄로 숙청한다.

 

태종의 첫째 아들 양녕대군은 왕세자인데도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고, 자유분방한 활동과 기생을 좋아하여 폐위되고,
둘째 아들 효령대군은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될 것을 알고는 불가에 관심을 갖다가 후일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양녕대군을 폐위하는데 반대하는 신하들은 외지로 유배되었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아 후에 세종대왕이 된다.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도 그는 4년간 줄곧 국정을 감독하였고,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422년 태종은 보름이 넘게 병석에 있다가, 세종, 양녕, 효령 등 아들과 후궁과 그 자식들, 그리고 신하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태종의 능은 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이다. 원경왕후의 능과 함께 쌍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 자료출처 : 위키피디아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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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왕자의 난

 

태조 7년(1398년) 음력 8월 태조의 이복 형제 간의 싸움. (방원의 난 / 무인정사 / 정도전의 난)

 

태조에겐 정비인 한씨(신의왕후: 6남) · 계비인 강씨(신덕왕후: 2남), 두 명의 정처가 있었다.
강씨의 집안 배경 및 강씨의 두터운 인맥과 지모의 도움으로 개국왕에 큰 바탕이 되어, 정비로 삼고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한씨의 5남 이방원 역시 부왕의 창업을 도와 공로가 큰지라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398년(태조 7) 음력 8월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비밀리에 모의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이유로 여러 왕자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하려 한다며, 방석 · 방번 · 정도전 일파를 살해했다.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는 과정에서 이방원은 야심이 없던 둘째형 이방과(정종)에게 왕의 자리를 양보하고, 아우들을 살해한 주동자로써의 책임을 떠맡기는 형국이 된다.

 

 

제2차 왕자의 난

 

정종 2년(1400년) 태조의 동복 형제 간의 싸움. (방간의 난 / 박포의 난)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은 인격·공훈·위세가 방원에 미치지 못하여 항상 시기하고 의심하며 불안해 하고 있었다.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난을 성공적으로 이끈 지중추(知中樞) 박포는 상작이 높지 못한데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넷째 이방간이 왕세제 자리를 넘보고, 박포와 손을 잡아 난을 일으켰지만 이 역시 이방원이 승리로 이끈 후 이방간을 유배시키고 박포를 처형하였다.
이후 이방원은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으며, 아울러 2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그 해(1400년) 음력 11월 정종에게 왕위를 넘겨받고 이방원은 조선의 제3대 왕(태종)이 된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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