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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형(金鼻荊, 581년 ~ ?)은 진지왕의 아들로, 진평왕 대에 관리로 등용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579년에 진지왕은 사량부의 미인 도화랑을 불러 후궁으로 삼으려 했으나 도화부인은 남편이 있다며 거절하였다. 그 해 진지왕은 폐위되어 죽었고, 2년 뒤인 581년에 도화부인의 남편이 죽자 진지왕의 혼령이 도화부인에게 나타나 7일 동안 머무렀다 사라졌으며, 이후 비형을 낳았다.

 

이 소문을 들은 진평왕은 비형을 불러 궁중에 살게 하고 15세 때 집사 벼슬을 주었다. 비형은 밤마다 궁궐밖 귀신과 놀았는데, 하루는 진평왕이 비형에게 귀신 중에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냐고 묻자, 길달(吉達)을 추천하였다. 당시 각간 임종이 자식이 없어 왕은 길달로 하여금 임종의 양자가 되게 하였다. 임종은 길달을 시켜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문루를 짓게 하고, 길달이 거기에서 밤마다 자니, 사람들은 이를 길달문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치니 비형이 귀신을 시켜 이를 잡아 죽였다. 이후로 귀신들이 비형을 두려워하여 모두 달아났다.

 

 

진지왕

 

진지왕은 신라의 25대 왕이며, 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을 낳았다. 비형은 진지왕이 사량부의 미인 도화부인(桃花夫人)과 사통하여 낳은 자식이다. 진지왕은 즉위 후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워 4년만에 폐위된다. 야사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을 왕후로 만드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과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던 것을 이유로 미실과 사도태후가 결의하여, 노리부를 앞세워 폐위되었다고도 한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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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History (Korea)/-917 2014. 2. 15. 23:48

 

 

진흥왕(眞興王, 534년~576년, 재위: 540년~576년)은 신라의 제24대 임금이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삼맥종 또는 심맥부이다.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 갈문왕 구진(仇珍)과 법흥왕의 딸 식도부인(息道夫人, 지소태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흥왕은 정복 군주로 불릴 만큼 신라의 전성기를 누렸다.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한강 유역과 대가야의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고,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나라와 연맹 관계를 맺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 540년 : 7살 때 신라 법흥왕의 붕어로 왕이 됨.
  • 540년~541년 :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왕후가 섭정.
  • 541년~551년 :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섭정.
  • 544년 : 흥륜사를 창건.
  • 545년 :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
  • 548년 : 고구려가 백제(성왕)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할 때 나제동맹을 맺은 신라에서 주진(朱珍)을 보내 고구려를 격파.
  • 551년 :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침. 가야 사람인 우륵으로 하여금 신라에 악을 보급하게 함.
  • 553년 : 백제의 한강 하류 유역 점령. 황룡사를 창건.
  • 554년 : 백제 성왕이 신라 병사에게 죽음.
  • 562년 : 사다함의 공으로 대가야를 복속.
  • 568년 :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고침.
  • 572년 : 연호를 홍제(鴻濟)로 고침.
  • 576년 : 원화(源花) 제창 및 폐지. 화랑(花郞) 제창. 진흥왕 승하(43세).

 

 

가족관계

 

법흥왕은 진흥왕에게 큰아버지인데, 동시에 외조부이기도 하다. 법흥왕이 동생에게 딸을 주었다;
진흥왕이 죽고난 뒤 신라의 왕위는 태자 동륜이 죽어(572년) 차남인 사륜(진지왕)이 승계하였다.

 

 

순수비

 

진흥왕은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다.
- 가야를 정복한 후 세운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
- 한강 유역을 장악한 후 세운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보 3호, 북한산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는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한 후 세운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북한 국보 111호),
-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북한 국보 110호)

 

 

황룡사

 

황룡사(皇龍寺)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서, 9층 목탑, 장륙상(丈六像)과 더불어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유명하였다. 경주에서 가장 컸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 고종 25년(1238년)에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고, 현재 그 터인 황룡사지(皇龍寺址)가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화

 

원화(源花) 제도가 만들어져 남모와 준정, 두 여인을 원화로 하여 300여명의 젊은이들을 거느리게 했으나, 곧 두 여인이 서로 시기하다 준정이 남모를 살해하였고 준정도 사형에 처해졌다. 이 일로 원화 제도는 없어지고 외양이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이름을 화랑(花郞)이라 하여 고구려, 백제 정벌의 원동력을 이루게 하였다.

 


WRITTEN BY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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