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도, 본관은 전주, 사후 묘호는 세종(世宗)이다.
재위 기간 동안 과학∙경제∙국방∙예술∙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찬란한 업적을 많이 남겨 위대한 성군(聖君)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세종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삼남으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유독 좋아하였다.
1418년 태종은 황희 등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첫째(양녕대군)의 심각한 비행을 이유로 왕세자에서 폐위시킨다.
뒤이어 셋째 충녕대군(세종)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충녕대군은 1418년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으로 즉위한다.
태종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되어 있던 황희는 세종의 외숙부들을 죽음으로 몰고 세종의 세자 책봉을 반대했지만 세종은 그의 사람됨이 바르다는 것을 알고 중용한다. 세종은 황희, 맹사성, 윤회 세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 국방 업무는 김종서에 위임하였고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 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그 외에도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집현전을 설치하고, 1443년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정인지(鄭麟趾), 정창손(鄭昌孫), 이개(李塏) 등의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3년여의 연구 끝에 훈민정음을 친히 창제하여 1446년 음력 9월에 이를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20세기에 들어 주시경 선생에 의해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었다. 또한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각종 천문 관측 기구와 시계, 측우기 등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
국방 정비 면에서는 1419년 이종무 장군 등에게 명하여 대마도에서 왜구를 정벌하고 조선과의 무역을 허락하여 삼포를 개항했다. 이 후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다. 1433년에는 최윤덕, 김종서 장군등의 여진족을 토벌을 지시하고, 평안도의 4군(四郡)과 함길도의 6진(六鎭)을 개척하게 하여 영토가 두만강 및 압록강 유역으로 확대되었다.
문종과 수양대군(세조),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의 자식이 있으며, 1442년부터 1450년 붕어할 때까지 아들 문종이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세종은 죽어서도 부왕인 태종의 곁에 있고자 하였으나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손자인 예종 때에 경기도 여주로 이장되었고 능 이름은 영릉이다.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정인지·권제의 <용비어천가>, 정초·변계문(卞季文)의 <농사직설>, 정인지·김종서의 <고려사>, 설순(楔循)의 <삼강행실도>, 윤회·신장의 <팔도지리지> 등 각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WRITTEN BY
- 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