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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1457~1495, 재위 1469~1495)은 조선의 제9대 임금이며, 성은 이(李), 휘는 혈(娎)이다.

 

 

왕위 계승

 

세조의 장남이자 예종의 형인 의경세자. 그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
왕위를 계승해야 할 예종의 원자, 의경세자의 장자를 제치고 성종이 왕이 된 것은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장인인 한명회가 결탁하여 결정한 것이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20살이 될 때까지 7년동안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섭정 당시의 정치적 감각 덕분에 조정이 안정되었다. 수렴청정 기간의 모든 결정권은 한명회, 신숙주 등의 원로 대신들에게 있었고, 친정을 시작한 이후 성종은 권신들을 축출하고 길재, 김숙자의 문하생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사림파 / 문화 / 외교

 

친정이 시작되고 임사홍, 유자광 등을 축출하였으며 사림파 김종직 등을 등용함으로써 신진세력을 형성시켜 훈구파를 견제하였고 숭유억불 정책을 철저하게 실천하였다. 조선시대 초기 문물 제도는 성종 때에 거의 완성이 되었으며 문화 정책을 펴 <경국대전> 완성하고 반포,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악학궤범> 등 다양한 서적을 편찬 및 간행하였고, <경국대전> 에는 적서 차별과 서자의 관직 제한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을 삽입하여 서자(庶子)들은 본격적으로 차별을 받게 된다.
대외적으로는 압록강, 두만강, 함길도 일대의 여진족을 소탕하는 등 북방 방비에 힘썼다.

 

 

후궁간의 갈등

 

첫 부인,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는 18세의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였고, 첫번째 후궁 숙의 윤씨(폐비 윤씨)를 두번째 왕비로 간택하였다. 숙의 윤씨는 신숙주의 조카로 성종과 다른 후궁들 문제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의 갈등으로 유명하며, 여색을 밝히는 성종의 오른쪽 뺨에 손톱자국을 내어 폐서인되었는데 인수대비와 원로 훈신들의 탄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그 후 다른 후궁인 정현왕후 윤씨를 왕비로 삼게 되고 이는 중종의 생모가 된다.

 

 

최후

 

재위기간 25년 내내 선정을 베풀었던 성종은 폐비 윤씨 사사 사건 문제를 자신의 사후 100년간 언급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승하하였고, 능은 선릉(宣陵)으로 현재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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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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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는 조선의 제7대 임금이다.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임금이자, 최초로 반정을 일으켜 즉위한 군주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이고, 휘는 유(瑈)이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서, 문종의 동복동생이자 안평대군 용, 금성대군 유의 친형이며 단종의 숙부이기도 하다.

 

세조 이유는 1417년 음력 9월 24일 당시 본궁(本宮)에서 충녕대군이던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유아 사망의 정도와 궁실의 분위기 때문에 궁밖 민가에서 자랐고 5세 무렵 입궐 하였으며 처음에는 진평대군 이었으나, 훗날 1445년(세종 27년) 수양대군으로 개봉되었고, 1428년(세종 10년) 파평 윤씨 윤번의 딸 윤씨(후일의 정희왕후)와 길례를 올렸다.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나 일찍이 글재주가 없음을 깨닭고 활쏘기와 무술 연마에 정진하였다.

 

세종이 병들고 세자였던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을 때, 둘째 아들 수양과 셋째 아들 안평에게 야심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부왕 세종대왕은 수양과 안평을 궐 근처에서 떨어져 있게 했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병약함을 기회로 일부 국정 전반에 참여 하였는데, 정치보다는 학문과 서적 간행에 힘쓰면서 인맥을 형성하여 한명회, 권람을 알게 되고 그들로부터 뒤에 신숙주, 정인지 등의 집현전 인재들을 포섭하게 된다.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무신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노리다가 1455년(단종 3년)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황보 인, 안평대군을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부사에 올라 전권을 장악하였다. 결국 조카 단종은 훈신들의 압력에 의한 강제 퇴위였고 수양대군은 조선의 새 왕으로 등극한다. 이 과정은 이후 사육신, 생육신 등의 반발과 사림세력의 비판을 초래하였고 공신 세력이 강성해지자 김종직 등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균형을 유지하려 하지만, 정변으로 조카를 축출, 작위 격하한 뒤 그를 죽인 도덕적 결함 때문에 사림파에 의해 오랫동안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세조는 즉위 후 한명회, 신숙주 등의 측근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왕권을 조선 역사상 최고로 강화시켰고, 국방을 튼튼히 했으며, 호패법을 복원하였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경국대전>,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 법전, 역사서 같은 공익적 편찬 사업을 주도하였다. 세종 사후 세조 때 다시 활판 인쇄술이 재확산되는데, 활자를 주조, 보급하여 활판 인쇄와 서적 출간을 장려하고 대장경을 인쇄하여 유포하기도 하였다.

 

1457년 세조는 악몽을 꾸더니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한 뒤 폐서인시켰다. 만년까지 세조는 심한 악몽에 시달렸고, 악몽을 계기로 불교에 귀의할 결심을 한다. 이는 유교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의 국가 이념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지만, 여러 불당의 중수와 창건을 지원하였다. 또 불교가 가지고 있는 호국성에 근거하여 국방력과 집권체제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원각사를 세우고 <월인석보> 를 간행하였다.

 

1468년 세조는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자, 한명회 및 신숙주, 구치관에게 왕세자(둘째아들 예종)를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한 뒤 왕위를 물려주고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 양주의 광릉(光陵)이다. 능호는 신숙주의 의견을 참조하여 광릉으로 정했다. 사후 일부 무속인들에 의해 무속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하였는데 그를 모신 대표적인 신당으로는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던 복개당이 있으나, 1978년 철거되었고 복개당에 보관되오던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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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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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은 조선의 제6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이고, 휘는 홍위(弘暐)이다.

 

1441년 문종과 현덕왕후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몸이 약한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 지 3일 만에 산욕으로 세상을 떠나고,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단종은 1448년 8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세종은 조선 5대 왕 문종이 병약한 이유로 일찍이 황보인·김종서·성삼문·박팽년·신숙주 등에게 왕세손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다. 1450년 단종은 문종이 즉위한 그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52년 문종이 병으로 승하하며,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어릴 때부터 매우 영리하였으나 혼자서 나랏일을 결정할 수가 없었고, 점점 정국이 불안해진 가운데 위축된 왕권과 달리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 등 종친의 세력이 나날이 팽창되어 갔다.

 

단종이 즉위하고 1년 만인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여 홍윤성·홍달손 등의 병력을 동원함으로 문종의 고명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김종서·정분 등을 죽이는 계유정난을 일으키게 된다. 곧이어 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 사사시키며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수양대군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켰다.

 

1455년 단종은 한명회·권람 등의 강요에 못이겨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1456년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동모자인 김질의 고발로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 후 단종도 이 사건에 관련지어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다시 경상도 순흥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사되자 단종은 노산군에서 다시 강등이 되어 서인이 되었으며, 계속해서 자살을 강요당하다가 1457년(세조 3) 영월에서 죽었다. 사람들은 화가 미칠까 두려워 시신을 방치했고 그 지역 호장으로 있던 엄흥도는 관을 비롯한 장례 기구 일체를 혼자서 마련하여 정중하게 장사를 치른 후, 벼슬을 내놓고 숨어 살았다.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죽음을 당한 이개, 하위지, 유성원, 성삼문, 유응부, 박팽년 등의 6명을 사육신(死六臣)이라 하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한 평생을 죄인으로 자처한 이맹전, 조여, 원호, 김시습, 성담수, 남효온 등 6명을 생육신(生六臣)이라 한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과 강봉은 200여 년 후인 1681년(숙종 7) 신원되어서 대군에 추봉되었으며, 1698년(숙종 24)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능은 단종이 목숨을 끊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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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귀신
정신 못차리면, 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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